[김풍진 변호사] "삼월은 애국자의 달"

Submitted byeditor on금, 02/25/2022 - 08:24

[SF = 하이코리언뉴스] = 소련에서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기세가 처음에 살짝 보이자, 전세계는 긴장상태로 들어갔다.  나는 그 복잡한 세계정세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즉각반응에 감동했다. 20세 안팍 청년들이 너도 나도 다투어 가며 자진 전투 훈련을 하있다. 강추위에 옷을 두툼히 입고 눈으로 덮힌 숲속으로 가서 사격 연습을 개인적으로 하고있다. 정부의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강국 소련의 침공대비를 진지하게 자발적으로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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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삼일절을 기하여, 일본의 침략에 목숨을 건 조상들을 다시 새겨보고 싶다.삼일절은 거대한 애국운동이었다. 나는 삼일절 이전에 일어났던 일로 잘알려지지 않은 열사 두분의 얘기에 흠뻑 빠지면서 찾을수있는 기사는 모조리 열독하면서, 혼자서 울었다. 이 두 열사의 이름은 장인환과 전명운이다. 

때는 1908 년 3월 23일 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또오 히로부미 암살은 1909년 10월 26일, 한일합병은 1910년 8 월 22일 이었으니, 장인환과 전명운 사건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보다 앞섰던 일이었다. 무대는 샌프란시스코 이었고,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한인 인구가 약 60 명 정도로 하와이의 사탕 수수밭에서 계약노동으로 왔다가, 샌프란시스코로 빠져나온 몇가정이었다. 이들은 격심한 문회적 차이, 경제적 각박함, 사회적 따돌림, 조국에대한 향수 등으로 몹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대해의 작은 고도이었지만, 같이 웃고 같이 울면서 조국을 열열히 사랑하는 일이 오직 삶의 동력이었다.

1908년 3월 22일, 한인들은 급히 모임을 갖었다. 덜함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s)라는 미국 고위층 외교관을 어떻게 할것인가라는 심각한 의논을 하였다. 스티븐스는 일본에서 갖은 훈장과 칙사대접을 받고 귀가하는중,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 내용은, 일본은 한국하고 비교도 안되게 월등한 국가이고, 일본인들은 한국인보다 우수한 민족임으로, 한국은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것이 한국을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기사를 읽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동포들은 끓는 분노를 진정시키면서 대책을 모색하였다. 존경받는 네사람을 뽑아, 스티븐스가 묵고있는 페어먼트 호텔로 찾아가서 신문기사 내용의 번복을 요구하기로 했다. 호텔로 스티븐스를 찾아가자, 그는 우리의 요구를 한마디로 잘러버렸다. 도리어 덧부치기를, “한국은 일본 통치하에 들어오는 것이 한국인들의 최상의 삶이 될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 네사람중 하나가 분에 못이겨 벌떡 일어나서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 집어 스티븐스에게 던지었다. 남어지 세사람이 황급히 그를 끌고 호텔방을 나와, 우리 한인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왔다. 정황을 듣던 한인중 하나가, ”나에게 총 한자루만 구해주시오, 나는 그를 죽일겁니다.” 그는 32세의 장인환 이었다. “나는 내목숨을 걸고 그가 마땅히 죽어야 함을 전세계에 알리곘소,” 라고 울부짖었다. 또하나의 젊은이가 일어나 똑같은 말을했다. ”총을 구해 주십시요”라고. 그는 24세의 전명운이었다.

한인들은, 스티븐스가 다음날 아침 샌프란시스코 부둣가에서 배를 타고 오크랜드로 건너가서, 거기서 기차로 워싱턴으로 가는 여정을 알아냈다. 다음날 아침, 부둣가에 스티븐스가 일본 외교관차에서 내리자, 전명운이 한방 쏘았다. 불행이도 불발로 실패가 되자 전명운은 그냥 스티븐스에게 달려들어 총대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때에, “탕! 탕! 탕!” 하고 세방의 총성이 들렸다. 장인환이 쏜 세발의 총알로, 한방은 전명운의 어깨를 뚫었고, 다른 두방은 스티븐스를 적중하여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이틀후에 사망했다.전세계의 신문이 이를 보도했다. “한인이, 미국의 극동 아시아 전문인 외교관을 사살하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즉시 체포되고 재판을 받게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은전세계에 호소했다. 변호사비용과 통역관 비용을 보태달라고.  쎌폰도 없던시절에 전세계에서 분개한 한인들이 협조를 보내왔다. 그때에는 이불안에 숨겨놓았던 잔돈이 대부분의 전재산이었는데 그걸 다 털어 내놓았다. 놀랍게도 상당한 자금이 모였고, 재판은 잘 되어갔다. 총을 쏜 이유는 열열한 애국심에서 나온 행위이었고, 그렇게 나라를 애끼는 마음은 이해해 준다고 판사가 사형을 면제해 주었다.

장인환은 30년, 전명운은 무죄로 판정되었다. 장인환은 10년살고 풀려 나와서 자유의 몸이되어 귀국했으나, 정부애서나 어느누구도 알아주지도 않고, 아무 도움을 못주는, 사회에 발부칠데도 없는 외톨로 결국 자살을 했다. 정말 우리정부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전명운도 그 사건후로 인생이 어려웠고 행복하지 못했다. 진정한 애국자들의 서글픈 일생이었다. 

그래도 이에 깊은 감명을 받고, 안중근 의사가 이또오 히로부미 총격사살에 성공했고, 윤봉길 의사도 일본 장교 사살에 성공, 이봉창 의사도 천황폐하 사살시도를 감행했다. 미국정부와는 달리, 일본정부는 이들에게 견딜수 없는 잔악한 고문과 신속한 사형을 가했다. 

이 진정한 애국자들은 조국을 위하여, 즉, 국가의 위신과 명예, 독립과 존속을 위하여, 죽음을 서슴치 않고 선택했다. 나는 114년전의 일어난 순수한 애국의거를 회상하면서,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의 명복을 경건히 빈다.    

칼럼출처 : 김풍진 변호사 < pjkimb@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