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진 변호사] "거인, 루쓰 베이더 긴스버그"

Submitted byeditor on화, 09/29/2020 - 05:16

[하이코리언뉴스/편집국] = 검은테의 커다란 안경을 쓰고, 까만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뒤로 넘기고, 잔잔한 미소를 짓는, 조그마한 몸체의 여성이, 거인 루쓰 베이더 긴스버그 (Ruth Bader Ginsburg) 미국 대법원의 대법관이다.  그녀는 췌장암을 비롯하여 몇년 전부터 많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강인한 정신력을 잃지않고 많은 중책을 87세 끝까지 수행한 비범인이다.  그녀의 업적은 여성의 권익을 단단히 다지어 놓으면서 부터 시작하여, 사회의 잘못되고 부당한 법과 풍습과 관례를 뒤집어 정의를 바로 잡은 미국의 여성 법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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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스버그 판사는 1933년 뉴욕에서 태어나서, 2020년 9 월18일에, 수도 워싱턴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법원 입구에는 그녀의 타계이후 계속 꽃 다발이 쌓이고 있다.  그는 여성의 지도자이자 선구자로, 지금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누리는 법적 동등 권리와 사회적 동등 대접을 힘들여 쟁탈한 거인이다.  미국 주류 백인들의 극심한 보수성향과, 변화에는 강력히 거부하는점을 보면, 긴스버그의 업적은 더욱이 위대하다.    

그녀는 하바드 법대에서 500명 학생중 9명뿐인 여학생의 하나로, 또 월등한 성적으로 주목을 끌었으나, 여자가 남자의 자리를 빼았었다고 질책을 받았다.  수재 법대 졸업생이 얻는 영광스러운 판사의 보조원 자리도 여자라고 안되는걸 간신히  얻었으나, 타이피스트로 밖에는 직책이 주어지지 않았다.  법조계에서 대 활약할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어도, 여성이었기에 긴스버그에게는 아무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당시 여성들은 그걸 당연한 대접으로 알았고, 설사 분노를 느꼈어도, 법적이나 사회적으로 꼼짝 못했던 때가 불과1960년도이었다.  

긴스버그 판사는 판사 사무실에서 나와, 럿거스대학에서, 그후 콜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총명한 빛은 스며나와 카터 대통령이 중등 법원의 판사로 임명했고 (1980), 그후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의 제 2호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1993).   

긴스버그 판사는 흥분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차분히 문제점을 파악하고는, 부당성을 조리있게 공격해 나갔다.  그는 버지니아 주의 사관 학교에서 여자를 입학 안시키는 데에 나섰다. 여자도 남자 만한 신체력과 지능을 갖추었다면, 여성지원자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는것은 불법이라고 도전했다.  그런 도전을 상상도 못하고 당당히 버티었던 관계 요원들은 드디어 굴복하고, 오랜 관습과 전통을 깨고 사관학교 문을 여학생에게도 열었다. (US v. VA Military Institute, 1996)

그후, 한 여직원이, 같은 직장에서, 같은 자격으로, 같은 직책을 맡아 일 하는 남자직원의 보수보다 더 적다는 불평청원을 받고 시정행동을 시작했다. (Ledbetter v. Goodyer Tire & Rubber, 2007) 고용주는 그럴듯한 이유를 제출했으나, 그것은 미 헌법 보충안 제 14조에 해당하는 불법 차별대우라고 지적하면서, 당시 횡행했던 남여의 차별 월급제도를 폐쇄시키고, 남여동등한 급여제도를 법적으로 적립해 놓았다.   

이외에도 긴스버그 판사의 위대한 업적은 많다. 선거 투표권은 모든 국민의 기본 권리라고 주장하며, 투표권 사전 승인제도를 폐쇄시키었고, 동성결혼도 합법화했고, 여성의 동등권을 사회와 직장에서 뿐 아니라 가정내에서도 세워 놓았다. 남편만이 가정의 재정권 양육권 등에 절대권을 행사했는데, 이 제도를 무너트리고, 아내도 동등한 권리를 갖게 했다. 그는 여자도 만사에 결정을 짓고 선택을 할수있다고 주장했고, 또 그렇게 법을 제정했으며, 여성들이 좀 더 위신을 갖고, 진보된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그의 이러한 진보적 생각은 구태에 빠진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했고, 악명의 판사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실은 보통사람보다 한참 앞서가는 선구자로 인류를 공용세대에서 신속히 빠져 나오도록 한데에 불과한 것이었다.  

긴스버그 판사의 업적 내용도 훌륭하지만 그의 일하는 습관도 존경스럽다. 그는 남편 장례식 다음날도, 직장암 수술 다음날도, 췌장암 키모처방 다음날도, 법정에 나와서 법정 공방전에 참여하여 임무를 다 했고, 산더미 같은 법정서류도 밀리지 않게 극한 상황속에서도 신속히 처리하였다.  

긴스버그는 자신의 본업인 법적일에 열중하는 이외에도 다양한 개인 취미활동도 풍요롭게 즐기었다.  전문서적 이외로,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을 넓게 읽었고, 글도 많이 썻고, 현대 미술도 즐기었고, 음악도 그냥 듣고 즐기는 이상으로 오페라를 몸소, 동료 스칼리아 판사와 공연하기도 하였다.

가족생활도 모범적이었다.  코넬 교정에서 만난 동창생과 결혼해서, 남편 역시 암으로 세상 떠날때까지, 56년을 함꼐 행복하게 살았다. 남편도 판사 이었고, 두 내외도 누구 못지 않게 언쟁을 벌렸지만,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말다툼 이었다.   

긴스버그 판사의 가장 존경할점은 사회적 모순이나 불의를 보면, 바로 잡곗다고 마음 먹은후, 투쟁으로 들어가서 꾸준한 노력으로 끝내 바로 잡을것을 바로잡아 놓는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능력이 남보다 빨랐고, 조그마한 체구 답지않은 용기와 추진력이 놀랍게도 강했고, 결말을 깔끔하게 매듭지웠던 여성 위인이다그녀의 공로를, 우리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혜택을 누리며 편하게 살고있다.  

긴스버그 판사의 장엄한 추도식을 TV 에서 보면서, 나는 장거리 방문객으로, 머리숙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칼럼출처 : 김풍진 변호사 < pjkimb@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