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영철, 원고 안보고 남한 군간부, 부대배치 줄줄이 꿰"

Submitted byeditor on금, 01/22/2016 - 09:22

北김영철, 원고 안보고 南 軍간부·부대배치 줄줄이 꿰”

인민무력부 부부장 출신 최주활 회장 “北김영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독한 전략가’” 

최근 정찰총국장에서 통일전선부장으로 승진한 것으로 알려진 김영철이 오랫동안 군에서 남한 관련 분야를 담당해온 ‘대남전략가’란 증언이 나왔다. 특히 대남 공작 업무를 총괄 지휘하는 정찰국장으로 10여년 간 일하면서 한국 군 사정을 꿰뚫고 있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는 ‘독한 전략가’란 평가도 나왔다. 

1980년대 북한에서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부부장을 지내면서 그를 가까이서 지켜봤다는 최주활 탈북자동지회장(전 북한군 상좌)은 “김영철은 한국군의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는 데다 전략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라면서 “대남전략을 다루는 데 있어 매우 치밀한 전략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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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활 탈북자동지회 회장" 사진  NK데일리 김가영 기자

18일 데일리NK와의 인터뷰에서 최 회장은 “1980년대 말 북한에서 격주 토요일마다 중앙당 강연과 인민무력부 강연이 열렸는데, 당시 김영철은 정찰국 7부장 지위였음에도 연단에 올라 남한의 정치·군사 정세에 대해 강연할 권한을 가졌다”면서 “1시간 반 동안 진행된 강연 내내 원고를 단 한 번도 보지 않고도 남한 군 간부들의 이름과 임명 날짜, 부대 위치, 전력 배치, 안보 회의 내용 등을 줄줄이 읊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뽐냈다”고 기억했다. 

최 회장에 따르면, 김영철은 출신 성분이 백두산 줄기도 아닌 데다 중국에 친인척까지 많이 있어 여러모로 승진에 제약이 많았다. 정찰국 내에서 해외 공작 교육을 철저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신 성분으로 인해 해외 파견 기회를 얻지 못한 그는, 오로지 실력만으로 고위 간부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매우 독하게 공부했다고 최 회장은 전했다. 

이런 김영철을 눈여겨본 이는 장성택의 형 장성우였다. 1980년대 정찰총국장이었던 장성우는 자신의 비서 급이었던 김영철이 남한 정세에 매우 해박하다는 걸 안 뒤로 적극 밀어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영철은 1989년 2월 남북 고위당국자회담 예비접촉 당시 북측 대표로 협상을 주도하면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눈에 띄게 됐다고 최 회장은 전했다. 이후 김영철은 1990년 남북 고위급회담 북측 대표단으로도 참석했다. 

최 회장은 “김일성이 김영철의 회담 장면을 직접 시청하면서 ‘누군지 참 똑똑하다’고 말해 간부들이 김영철의 승진 작업에 들어간 걸로 안다”면서 “이후 10여년 간 정찰국장으로 활약했다. 작은 실수로도 좌천이 되는 북한군 내에서 10여년간 자리를 잃지 않는 건 유례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장성우가 1988년 좌천되면서 그를 배경으로 삼았던 김영철의 입지도 위태로워지는 게 아닐까 했지만, 김영철은 자기 처신을 굉장히 잘해 이제까지 신임을 잃지 않고 있다”면서 “김일성부터 김정일,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대남 전략 부문에 있어 김영철을 대체할만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영철이 통전부장뿐만 아니라 대남 비서 자리까지 오른 것으로 알려지면서 북한이 대남 강경책을 펼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통상 통전부장의 경우 당의 전략에 따라 주어진 임무를 집행하는 정도지만, 대남 비서는 북한 내에서도 상당히 높은 서열을 자랑하기 때문에 대남 전략에 있어서 김정은에게 제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영철이 ‘온건파’로 불렸던 김양건 전 통전부장 겸 대남 비서와는 전혀 다른 전략을 구상하거나, 혹은 정찰총국에서 도맡았던 강경한 대남 전략을 통전부로 끌어들여 추진할 수 있다고 최 회장은 내다봤다. 

최 회장은 “본래 정찰총국와 통전부는 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알리지 않아 왔지만, 김영철은 정찰총국을 좌지우지 하다가 통전부에 온 게 아니냐”면서 “따라서 정찰총국에 있을 당시 구상했던 전략이나 조직을 통전부에서 활용할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가면 도발까지 감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Q. 김영철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됐나.

김영철을 1980년 중엽부터 1995년까지 지켜봤다. 김영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건, 그와 같은 부서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대좌 노승일이 내가 일하는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으로 전보돼 오면서다. 노승일과 김영철은 1966년 경 정찰국 소속의 평안남도 회창 외국어 강습소를 졸업했다. 이 강습소는 외국에 파견할 스파이를 양성하기 위해 정찰국이 운영한 곳으로, 김영철은 이곳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김영철이 정찰국 상좌가 된 후로는 어릴 때부터 친했고 한 때 함께 일했던 노승일을 만나러 인민무력부 대사국으로 자주 놀러왔다. 김영철이 노승일과 나눴던 이야기들이나 그의 평소 모습 등을 볼 기회가 많아 그의 성향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Q. 직접 본 김영철은 어떤 인물이던가.

매우 총명한 사람이다. 또 목표로 삼은 건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라도 꼭 달성하고야 마는 성격이다. 김영철에게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출신 성분이 백두산 줄기도 아니었을 뿐더러, 친인척이 중국에 넘어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1980년대 정찰국 소속 강습소를 졸업한 사람들 다수가 해외로 파견됐지만, 김영철에게는 그런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영철은 내가 일했던 대사국도 자주 방문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파견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하지만 끝내 김영철은 파견되지 못했다. 

그래서 김영철은 전략을 바꿨다. 실력만으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는 1980년대 말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매달 1, 3, 5주 이렇게 격주 토요일마다 강연회를 열었다. 당 비서급과 간부급, 장군급이 모이는 중앙당 1조 강연과, 대령 이상 간부들과 내각성 국장급 인사들이 모이는 중앙당 2조 강연, 그리고 무력부 강연이 대표적이다. 그 때 김영철은 정찰국 7부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고위급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 강연자로 자주 나왔다. 보통 1시간에서 1시간 반 가량 강연을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원고 한 번을 보지 않고 남한의 정치·군사 정세를 줄줄이 외워 설명했다. 남한의 군 체계부터 간부들의 이름과 직위, 임명 날짜, 안보 회의 내용, 부대 위치, 전력 배치 등 모르는 게 없었다. 

Q. 김영철이 좋지 않은 출신 성분으로도 고속 승진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건가.

그렇다. 물론 김영철의 뒷 배경이 돼 준 한 사람이 더 있었지. 바로 장성택의 형 장성우다. 당시 장성우는 정찰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김영철을 자신의 비서처럼 썼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김영철이 보통 똑똑한 게 아니지 않은가. 그 때부터 장성우가 김영철을 많이 밀어줬다. 

김영철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신임을 얻게 된 계기는 그 이후 1989년 2월 남북 고위당국자회담 예비접촉 당시 북측 대표로, 1990년 9월 1차 남북 고위급 회담 때 북측 대표단 성원으로 나오면서부터다. 당시 김일성이 김영철의 회담 장면을 직접 보면서 ‘누군지 참 똑똑하다’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철의 승진 작업이 신속히 이뤄졌다. 1991년엔 정찰국 부국장 직위를 달았다. 아, 김영철이란 이름도 아마 이 과정에서 달게 된 걸로 안다. 본명은 김동수다. 김일성이 자신도 빨치산 시절 여러 가명을 썼다면서 김영철이란 이름을 써도 좋겠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김영철이 노승일에게, 그리고 노승일이 내게 알려준 이야기다. 

Q. 장성우가 김영철을 밀어줬다는 게 흥미롭다. 그런데 장성우-장성택 모두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나. 김영철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던 건가.

그렇지 않아도 장성우가 1988년 정찰총국장 자리에서 좌천되면서, 그의 힘으로 일어서게 된 김영철도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김영철은 평소에는 말수도 줄이고 자기 처신을 매우 잘했다. 특히 장성우가 힘을 실어줬다고 해도 김영철은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실력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현재 김정은이 김영철을 주요 직책에 올린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대남 전략 부문에 있어 김영철을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는 것이다. 

김영철은 정찰국장으로 10여년을 일했다. 이후 정찰총국장 지위에도 오르고. 북한 군 역사를 통틀어 봐도, 한 직책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일한 전례는 없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김영철은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의 신임을 확실히 받았다고 봐도 된다. 

Q. 김영철은 상당히 강경한 대남 전략가로 평가된다. 이전 통전부장이었던 김양건과 상반된 성향이라고 하던데, 앞으로 통전부에서 어떻게 나올 것으로 내다보나.

김영철이 통전부장뿐만 아니라 대남 비서직까지 맡았으니 자신의 스타일대로 강하게 나올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통상 통전부장은 당의 전략에 따라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정도라면, 대남 비서는 대남 전략을 총괄하는 권한도 갖고 있다. 게다가 본래 정찰총국와 통전부는 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알리지 않아 왔지만, 김영철은 정찰총국을 좌지우지 한 경험이 있지 않나. 따라서 통전부에서 일 하면서도 정찰총국장 당시 구상했던 전략이나 조직을 계속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작전부나 조사부 업무 등 정찰총국이 도맡았던 일을 통전부로 가져올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군과 충돌할 위험도 있으니 시기를 잘 살필 것이다. 김영철은 매우 영리한 사람이잖나. 김정은의 신임을 재확인하고 대남 분야에 있어 자신의 입지를 완전히 굳힌 후, 김양건이 해왔던 일들을 자기 식으로 다듬어 갈 것으로 보인다. 

Q. 예를 든다면?

내가 북한에 있을 때 통전부는 조총련이나 해외 교포 사회를 대남 혁명을 위한 기지로 꾸리고는 했다. 그 길로 대한민국 국민들을 선동해 간첩망을 조직하려는 것이다. 김영철은 군 출신이니 대남 전략을 ‘도발’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도 있다. 다만 도발은 늘 군의 몫이었으니, 김영철이 이를 어떻게 다듬어갈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NK 데일리 김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