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파크=하이코리언 뉴스] 장마리아 기자=플로리다 올랜도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 치과의사인 공형준 원장은 올랜도근처의 윈터 파크 (Winter Park)시에서 개원해 5년째 환자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지난 1989년 한국에서 대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고 미국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문화적, 언어적차이로 인한 향수병으로 어려운점도많았지만 학업에 열중하면서 외로움을 스스로 극복해 나갔다. 1994년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 위치한 오하이오주립대학교 (Ohio State University)를 화학과 전공으로 졸업하고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노스웨스턴대학교 (Northwestern University)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누구나 그러했듯이 그도 대학졸업후 앞으로의 삶의 진로에 대해 많은진통을 겪었다.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서 치과를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 제약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군미필자로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여권으로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있는 50여개의 치과대학중 노스웨스턴대학교를 선택한 이유중 하나도 졸업학점을 성공적으로 수료하는 학생에 한해서한학기 조기졸업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치과대학에서 학과수업은 이미 정해진 코스대로 진행돼 어쩔 수 없었지만 환자치료를 하면서 학점을 수료해야 하는 임상치료는 학생 스스로 조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정규진료시간뿐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야간진료시간에도 환자치료를 해 임상학점을 받았다.
그래서 "간신히 졸업할 만한 턱걸이 정도의 임상경험을 쌓은 것 아니냐"고 고 넌즈시 물었더니 그는 "상위몇퍼센티지에 들 만큼 학교성적도 괜찮았고"고 웃으며 답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97년 12월 그는 동기생들보다 한학기 먼저 졸업을 했다.
조기졸업으로 그의 고민은 끝난게 아니었다. 당시 대한민국 의료법상 외국에서 치과대학을 졸업한 치과의사는 해당 국가의 치과의사 자격증을 제출해야 국내 치과의사 국가고시를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미국으로 유학오기 전 받았던 병무청 신체검사 등급상 일반병으로 군복무를 해야했다.
그래서 그는 치과대학을 졸업하기 전 1997년 12월 미국 동북부 지역 치과의사 자격증 시험을 응시해 치과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귀국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은 아니었다. 미국 치과의사 자격증은 국내에서 치과진료를 할 수 있는 치과의사 면허증이 아니기 때문에 국내 치과대학생들이 치르는 치과의사국가고시를 합격해야 병역특례로 의료혜택이 미치지 못한 국내 오지에 위치한 보건소에서 치과의사로 근무할 수 있었다. 수년간 시험을 치르는 게 많이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에게도 이번에는 또다른 도전이었다.
치과의사국가고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비록 한글에 능숙하지만 미국에서 영어로 배우고 익숙했던 치과용어를 한글 또는 한자로 다시 공부해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9개월간의 진통끝에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국내 치과의사면허증을 발부받고 치과의사로서 강원도 횡성군보건소와 보건지소에서 3년간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알게되었던 다른 의과, 치과, 한방선생님들과도 14년이 지난 지금도 형, 동생하면서 연락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시골 보건소에서 치과의사가 해야 하는 일은 주민 치아보건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관할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치아우식증을 예방하기 위한 치아홈메우기 (Sealant), 불소도포(Fluoride Treatment)와 보건교육을 함과 동시에 주민들의 치과진료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중 대부분의 진료환자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충치와 풍치로 인한 통증을 치료를 받아 살릴 수 있는 치아도 많지만 치아를 발치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치과대학에서 배웠던 기본적인 치과지식과 임상경험으로는 환자분들을 만족스럽게 치료를 할 수 없다는 한계를 3년간 보건소에서 경험한뒤 그는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했다.
2002년 군복무를 마치고 플로리다주 Gainesville에 위치한 플로리다대학교 보철전문의 과정을 위해 다시 한번 유학의길을 떠났다. 치과보철이란 충치나 풍치, 그리고 사고로 인한 외상으로 상실되거나 손상된 치아와 그 주위 조직을 인공재료로 치료하여 환자의 상실된 저작기능이나 심미등을 회복시켜수는 치과전문분야다. 그는 3년간의 레지던트 과정동안 크라운, 브릿지, 전체틀니, 부분틀니, 및 임플랜트에 대해 심도있게 공부하며 임상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보철은 다른 치과전문과목과 달리 치과기공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진료시간 이후에는 치료받고 있는 환자들의 기공물을 제작하느라 애를 썼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중 한분은 치아 전체가 닳아 없어져 심미적으로, 기능적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없었는데 약 1년 이상의 치료끝에 임플랜트와 기존치아를 이용해 무려 26개(unit)의 크라운과 브릿지를 상악과 하악에 장착하여 건강한 웃음과 식생활을 되찾은 경우다. 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논문을 찾아 공부하고 교수님들께 의논하면서 치료계획을 위해 기공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했지만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2005년에 보철 전문의 과정을 마치면서 부모님과 친척, 친구들이 있는 한국으로 귀국해 개업할 꿈도 있었지만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서 St. Louis 근교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Southern Illinois University치과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로 결심했다. 치과대학 교수로 부임하고 처음으로 치과대학 신입생의 히포크라테스선서 (Hippocratic Oath)를 들으면서 1994년 치과대학 1학년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중 '내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를 정성껏 치료해 환자가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의술을 원하는 사람에게 가르칠 것'에 대한 맹세의 기억이 아마도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보철과 조교수로 학생들을 위한 수업준비, 임상치료로 매일 바쁜 하루를 보냈으며 학생들 사이에서는 깐깐한 동양계 치과교수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후 같은 치과대학에 있는 임플랜트Fellowshiop 프로그램을 맡아 보다 선천적으로,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치아가 부족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플랜트를 이용해 Fellow 학생들과 함께 치료하면서 가르쳤다.
하지만 그에게도 치과개원이라는 꿈이 마음 한구석에 계속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2008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언젠가 다시 치과교육에도 참여할 것을 다짐하면서 전문의 과정을 공부했던 플로리다로 다시 내려와 환자진료에 전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0년 올랜도 근교 Winter Park이라는 곳에서 그의 꿈을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나름대로의 뚜렷한 진료철학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의료서비스를 많은한인환자뿐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제공하고 있다. 공원장은 "내 부모님, 또는 형제, 친구를 치료한다는 마음"으로 매일 매일 환자진료에 성심성의껏 매진하고 있다.
현재 공원장은 치과진료뿐 아니라, 보철전문의 과정을 했던 플로리다대 보철과 임상교수로 레지던트들에게 나름대로의 치과지식과 임상경험을 가르치고 있으며 다른 치과의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임플랜트강의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