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포럼"참 자유(自由)를 찾아"

Submitted byeditor on금, 04/28/2017 - 10:46

[하이코리언뉴스] 며칠전 한 지인으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지난해 연초에 만나고 그동안 간혹 안부 통화를 했는데 며칠 전 전화는 왠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왠 일이냐”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나왔다. 그도 괜히 전화를 걸었다는 마음이었는지 성급히 안부 전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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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용히 무슨 일이 있느냐고 재차 물으니 그제서야 그 동안 30여 년 다니던 교회를 나왔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적지 않게 놀랐다. 그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고 평소 영성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그의 결단에 대해 묻기가 두려웠다. 그가 자신이 그토록 오랜 기간 자랑스럽게 섬기던 교회를 떠날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매우 차분한 목소리로 특별히 다툼이나 아픔이 있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특별한 다툼도 없고 아픔도 없었다면 나올 이유도 없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조용히 있고 싶어 그는 자유를 찾고 조용히 있고 싶어 나왔다고 했다.빨리 와닫지는 않았지만 그가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 놓았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가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고 책임감을 가졌던 직분을 내려 놓고 자기를 잘 모르는 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니 중압감에서 벗어나 날아갈 것 같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 나갔다.

자신이 신앙생활 중에 책임감을 늘 염려했고 주위에서 불러 주는 호칭에 눌리어 크게 숨도 쉬기 어려웠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교회 정치와 자리 보존을 위한 어려웠던 시절도 되돌아 보게 되었다는 말도 했다. 그런 것이 신앙생활이고 그런 인고(忍苦)를 끊을 수 없는 것이 직분의 소명 아니냐고 되물으니 어떻게 오랜 기간 그런 신앙생활을 했는지 다시 해 보라면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공동체 안에서 자유를 느낄 수 없다는 뜻 같은데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냐고 말을 하니 자신도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지만 자신이 그 동안 가졌던 직분 또는 교회의 어른처럼 처신했던 모든 것이 큰 일이 아닌데 훌훌 내려 놓고 보니 너무 늦은 것 같다는 말도 했다. 특별히 지나온 신앙생활에 대한 후회를 한다기 보다 자신이 좀 더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 했다면 하는 늦은 후회도 있다는 고백이다.

무엇을 기대하나 그런 대화가 오간 후에 앞으로 어떤 생활을 기대하느냐고 물었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새 교회에서 직분 없이 새로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니 우선 자유로워서 좋았고 자신에게 어떤 기대를 거는 분이 없어서 너무 홀가분한 촌부의 신앙생활을 만끽하고 있어 즐겁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거리의 노숙자’를 더 이해할 수 있겠다는 말을 했다. 다소 과격한 비유였는데 그는 너무 솔직히 동감한다는 말을 하고 비유가 좀 심한 것 아니냐고 웃음으로 대신했다.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가 잃어버린 가족들과 재결합할 뜻이 있느냐고 물으면 거의 과반수가 선뜻 대답을 못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과거 사회 속에서 너무 힘든 공동체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고통을 다시 감내할 자신감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를 읽은 적이 있었다. 사회나 가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책임감이고 직책이다. 가정에는 가장의 직책이 있고 사회에선 구성원의 책임이 있고 교회에서 직분의 책임이 있다. 피할 수 없는 책임감에 현대인의 삶이 시들어 가고 사고가 줄어 들고 있다.

물론 의지력이 강한 분들에게 이런 말이 애교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고통 받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오래 동안 정들었던 교회를 뛰쳐나와 거의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한다는 분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적지 않게 정신적 피로감에 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앞으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느냐”고 물으니 좋은 일만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다시 성경책을 읽으니 너무 머리에 잘 꽂쳐서 다시 젊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을 했다. 머리가 맑아진 것은 물론 하나님과 더욱 더 대화하고 자신도 닮아가는 착각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식적으로 무장했지만 오늘날 처럼 자연스럽게 말씀으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마지막 병사가 되겠다는 희생정신이 전에는 없었다고 했다.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각오도 생겼다고 강조했다. 그런 힘의 원천을 자유로 생각한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교회와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혜택도 받고 노력도 많았지만 참자유를 갖지 못했다는 뜻 아니겠나. 참 자유란 통화를 끝내고 나서 자유와 참자유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자유가 물리적인 해방을 의미한다면 참자유는 영혼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참 자유란 말은 종교에서 온 말 같은 생각은 들었지만 확신은 없다. 영혼의 자유를 쫒다가 히피(hippie)로 일생을 마감한 사람들도 많았다.

1960년대 히피는 미국의 과도한 물질문명에서 파생 되어 나온 사회의 이단아였지만 그들이 추구한 영혼의 자유는 아직도 그 세대를 겪은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다. 며칠 전 전화 주신 그 지인도 영혼의 자유를 갈망했던 것이겠지. 항상 신(神)의 가호가 항상 있기 바란다.

현대주간 김동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