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회와 언론은 왜 홀로 서야 하는가?

Submitted byeditor on수, 07/06/2016 - 20:27

한인회의 사유화는 권언 유착에서 부터 시작된다

‘정경 유착’, 한국 근대화 과정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말 중에 하나다. 지금도 그 유효력이 생생히 남아있는 이 단어는 반드시 뒤따르는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은 ‘부정부패’다.권력이 경제계에 특혜을 밀어주고 정치 후원금조로 되돌려 받는 일명 ‘짜고 치는 고스톱’의 전례를 남긴 것이다. 그 폐혜는 세금을 내는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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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새로 각광을 받는 단어가 있다. ‘권언유착’ 또는 ‘관언유착’이다. 권력이 언론과의 유착관계를 통해 ‘봐주고, 편들고, 호도하고, 자화자찬’하는 형태다. 권력이 가지고 있는 힘이나 특혜를 언론에게 밀어주고 언론은 중립적인 견제기능을 무시한채 권력 아부형 ‘스피커 폰’으로 전락하는 형태다.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협박과 압력으로 언론을 지배했지만 최근에는 사장단이나 운영진을 측근으로 임명하는 방법을 통해 끈끈한 유착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는 세월호 사건이후 보도를 통제한 이른바 ‘이정현 보도 개입’건으로 시끄럽다.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김시곤 전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세월호 관련 뉴스를 빼달라라고 했다는 주장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게다가 한국방송(KBS) 기자들은 이 건에 대해 KBS가 단신 보도조차 내보내지 않았다며 비판하고 나서고 있다. 세월호 사건을 놓고 아무런 보도를 못하는 주요 언론 및 방송을 지켜본 국민들은 이런 기자들을 ‘쓰레기’라고 통칭해 ‘기레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약자의 편을 들기보다는 권력의 편에 서는 언론때문에 생기는 폐혜는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 케이스다. 

1922년 언론인 월터 리프만은 대중의 알권리와 정부의 비밀주의에 대해 ‘국민의 알권리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국민에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했다. 1945년 AP 통신에 근무하던 켄트 쿠퍼는 ‘국민의 알권리가 없는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알권리’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과 국민의 참여를 활성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국민과 언론이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국가기관이 보유한 정보의 공유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알권리는 민주 시민의 당당한 권리이며 권력이 간섭할 수 없다는 개념과는 달리 한국의 역대 권력들은 어떤 형태든 언론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통해 대중들을 속여 왔다. 

이승만 정권은 1954년 국가보안법 등을 통해 일간지를 비롯한 여러 정기간행물들을 통제 한 후 독재적 성격을 띤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켰다. 박정희 시대때는  정권과 결탁한 언론 사주들과 기자들의 대립으로 점철된다.  유신체제에 맞서는 젊은 언론인들이 자유언론수호투쟁을 선언한 후 1975년 대량 해직된다. 전두환 정권때는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쥔 뒤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국군보안사령부 언론대책반이 만든 언론계 정화정비 계획에 의해 933명 대량 해직사태를 가져오는 언론 장악이 있었다. 

CBS의 변상욱 대기자는 이때 “언론사에 남은 언론인들에게는 특혜를 주며 회유를 시작했다. 언론사의 높은 임금과 각종 다양한 세금제도 상의 혜택이 시작되며 권언유착의 밀월관계가 형성된 것이 이때였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때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다수의 프로그램들이 폐지되는 사태가 이어졌다. KBS에서는 탐사보도팀, YTN의 돌발영상, MBC의 피디수첩 등 개혁적인 성향의 제작진들이 모두 좌천되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항상 자신을 미화해 줄 언론과 결탁하는 역사는 최근 SNS의 등장으로 개인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기회를 가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맡고 있다.   

권력이 전달해주고 싶은 선전 문구(propaganda : 정치 지도자・정당 등에 대한 허위・과장된 선전)에 신물이 난 일반인들이 자신들의 뉴스를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시대가 된 것이다. 

미주에 있는 한인 신문들은 어떤가? 

한국 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 미주의 한인 언론들이 만들어 내는 부작용은 더 심각하다. 한국과 달리 전문성이 없는 발행인과 기자들이 난립하고 있는 경우가 특징적이다. 언론인으로 전문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사람들이 공익보다는 사익을 위해 어느날 갑자기 신문이나 방송을 시작해서 지역 사회에 누를 끼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도시와 달리 디트로이트와 같은 중소도시에서 비전문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미주 사회의 어용 언론들의 추태는 다양하다. 주소록 편찬을 빌미로 광고비를 미리 받고 야반도주하는 경우, 정론지를 포기하고 홍보지로 전락하는 경우, 대형광고주의 입김에 대항하지 못하고 언론의 사명을 저버리는 경우, 기사 작성도 제대로 못하는 실력으로 민심을 호도하는 경우, 지역 한인회와 결탁하여 공생하는 경우, 자기 편들기에 눈이 멀어 한인 동포들을 모독하는 경우 등 수준 이하의 작태들이 난무하고 있다. 

미주에서 한인 사회를 결집시키고 미주류 사회를 대상으로 한인 사회를 홍보, 업그레이드 시키는 순기능을 담당하기는 커녕 저질스런 찌라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역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디트로이트 한인 사회에서도 최근 한인회와 지역 신문을 자처하는 모 신문이 결탁하여 힘없는 동포 가정을 지면상에서 공격하며 매도했던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폐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최악의 사태였다.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키나가기 위해 권력과 언론이 결탁하여 사건을 조작하고 자신들 편에 있는 사람들을 칭송하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건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특히 이민 사회에서의 지역 언론은 지역 사회 구성원들을 보호하는데 그 존재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언론이랍시고 한인회와 유착하여 동포를 모독하고 협박하는 행위는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만행이다.  

‘정경유착’이든 ‘권언유착’이든 문제는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를 대중들은 이미 다 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들도 처음에는 조심하다가도 이내 유착관계가 주는 달콤함에 빠져 대중의 시선을 고려할 마음도 잊어버린다. 

사람은 크건 작건 권력을 가지면 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기대한다. 남으로 부터 비판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지겨운데 비판을 듣는다는 것은 못견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방패역할을 하는 언론이 옆에 있다면 부패할 수 밖에 없다. 견제 세력이 없으며 대중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사욕이 생길 수 밖에 없고 공공의 단체인 한인회를 사유화 시키는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나라를 움직이는 정치인이건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단체장이건 감정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칭찬을 듣고 싶어하고 친한 사람과 더 자주 대화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공인’이 된다는 것은 칭찬하는 사람과 비판하는 사람을 모두 대표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과 달리 ‘공인’으로서 단체를 대표하는데는 갖추어야할 원칙과 기본이 있다. 그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자신을 ‘중립적인 위치’에 놓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공식적인 일을 처리하는데는 중립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중립성’을 지키는 것은 ‘공공성’을 지킨다는 의미다.

단체를 내 맘대로 끌고가고 그것은 비호하는 언론까지 가졌다면 무서울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둘 다 자멸하는 길이다. 그래서 외롭더라도 공인은 아무 편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에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언론이 그래야 하듯이... 

주간미시간 발행인 김택용 mkweekly@gmail.com